폭염은 영혼을 잠식한다, 영화 속에 비춰진 오늘날 우리의 모습

엄청난 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지병 때문인지 밤이면 잠을 청하지 못하고 2시간마다 깨어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물을 들이키고 있어 출근을 해도 멍한 상태이다. 1994년이 그렇게 더웠다는데 실제로 그러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출퇴근할 때 자동차의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그새 흘러내린 전신의 땀이 식혀질 때쯤 내려야 한다는 게 너무 싫을 정도다. 병원에서 제일 시원한 곳은 두말할 나위 없이 수술실이다. 그래서 겨울보다는 여름철 응급수술이 더 즐겁고 흥이 나는 모양이다.

교수연구실에서 출발하여 막장처럼,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구름다리를 건넌 후 병원 서관쪽 출입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올 여름 휴가 이틀은 영화를 보는데 온전히 바치고야 말았다. 2달마다 원고를 써야 하는데, 점점 머리도 굳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고갈되고 있다. 덮어놓고 영화를 보다 보면 뭔가 떠오르겠지 싶어 무작정 극장을 찾는다. 보통은 보고 싶었던 영화 리스트를 미리 뽑아 가용한 시간에 맞춰 극장을 찾지만, 멀티플렉스의 단점이랄까 예술성이 짙은 영화는 정말 보기 어렵다. 대규모 개봉을 하는 블록버스터와 달리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대개 소규모 상영관에서 심야시간에 아무도 모르게 잠깐 비췄다 사라지니 정말 빈익빈 부익부는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닥치는 대로 섭렵한 영화 몇 편 덕분에 그래도 이번에도 쓸거리가 생겼다.

“부끄러버서! 내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허스토리(2018)>에서 위안부 할머니를 이끌고 일본에서 관부재판을 통해 일부 승소판결을 받아낸 문정숙(문재인 대통령의 ‘문’과 김정숙 여사의 ‘정숙’을 합친 이름) 사장의 극중 대사이다. 사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다룬 영화는 최근 몇 차례 있었다. 그중 <아이 캔 스피크(2017)>와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 (2016)>가 비교적 잘 알려진 작품이지만, 어느 평론가의 말대로 이러한 영화는 “회상하지 않고 묘사하지 않고 감정에만 호소하지 않는다”란 대전제를 만족시킬 수 없기에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감에, 한국영화의 성공을 가늠하는 신파라는 절묘한 가늠자의 균형을 맞추지 못한 채 사그라지고 만다. 일부 작위적인 설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실제와 허구의 틈바구니에서 용케 일관된 플롯을 추진하는데 여기에는 김희애와 김해숙의 뚝심 있는 연기력이 한 몫 한다. 극 중에서 재판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할머니들에게 여관 측은 이들이 이불을 덮으면 더러워진다는 이유로 숙박을 거부하자 직접 이불을 가져가는 장면,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서 함께 부르는 노래가 하필 일본 군가라는 장면, 문정숙 사장이 재판 중 할머니들의 욕설까지도 감정을 실어 오롯이 통역하는 장면들은 실제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양하게 변주되어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위안부 문제는 보상(불가역적 합의란 없다)이 끝났다는 이유로 소재 자체를 불편해하는 많은 한국 관객이 큰 그림 대신 각자의 사연으로, 남성이 아닌 여성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어제가 아닌 오늘을, 고통을 넘어 연대를 촉구하는 민규동 감독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들(원제는 이별)’로 보아주길 바란다.

한편 거장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을 재창조해냈다는 이유만으로 기대가 컸던 <인랑(2018)>은 예상치도 못한 ‘깨어진 창문’에서 신랄한 몰매를 맞았다. 제주도의 예멘 난민을 옹호하는 SNS 때문에 엄청난 구설수에 올라 정작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한풀이 꺾인 배우 정우성, 그리고 출연배우들과 관련된 여러 논란들은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또 ‘SF액션인지 알았는데 알고 보니 멜로였다’는 등의 사실상 영화의 멱을 끊어버린 맥락과다의 인민재판식 마녀사냥은 금세 극장에서 영화를 찾기 어려울 지경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관객들은 혼돈에 가득 찬 2029년 대한민국의 근미래를 인정하기 싫었을 지도 모른다. 디스토피아처럼 보이지만 묵시록으로는 읽히지 않는, 무채색의 비정한 액션으로 가득 찼지만 한효주만큼은 온기와 감정이 있는 인물로 그려내려 한, 늑대(인랑)에게 잡혀 먹힌 빨간 망토(섹트)의 비극은 그런 면에서 꽤나 친정부적이다.

새 정부의 적폐청산으로 이전 정권의 가려졌던 비화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남북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루는 영화 제작이 최근 물살을 타고 있다. 북핵은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두렵고도 골치 아픈, 그러나 정보를 좌지우지하는 일부 집단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재화임에 틀림없다. 실화에 바탕을 둔 극화인 <공작(2018)>은 도입부에 면죄부를 깔면서 시작한다. 시나리오를 직접 제작한 윤종빈 감독의 이야기꾼으로서의 힘은 캐릭터들에게 확실한 성격을 부여하고 더불어 오직 직진하는 남자 영화로 부족하지 않다. 영화를 보는데 진보니 보수니 하는 외연은 그다지 필요 없다고 본다. 맥락으로의 지나친 함몰은 줄거리의 진행과 결말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영화에서는 두 남자(황정민, 이성민)의 체제를 뛰어 넘은 우정과 믿음을 이리 저리 돌려가며 잘도 버무린다. 이효리와 조주희의 만남 뒤에서 손목시계와 넥타이 핀으로 교감하는 두 남자의 눈빛은 찡하다. 그래서 영화는 실화 그대로가 아닌 부분적 각색과 압축, 생략, 강조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분명 재미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최근 여러 의미에서 ‘핫’해진 BMW 자동차(M5)가 나온다는 영화<미션 임파서블: 폴 아웃(2018)>. 탐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은 전작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건물을 뛰어넘다가 발목이 부러진 채로 절뚝거리며 촬영을 계속하고, 스튜디오 촬영 혹은 CG일 것이라 생각했던 무지막지한 장면들이 비행기, 헬리콥터에 실제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진행되었다는 후 일담을 목도하게 되면 찬탄을 넘어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조만간 예순이 되는 탐 아저씨가 이 시리즈를 끝까지 이끌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킬링타임용으로 딱 즐기기 좋은 구조(한치 앞도 볼 수 없는), 2시간이 넘음에도 불구하고 길다고 볼 수 없는 상영시간, 액션과 서스펜스, 멜로가 순종 전주비빔밥처럼 절묘하게 뒤섞인 블록버스터 영화의 교범이다. 최신 M5가 아닌 20여 년 전의 M5가 나온 점, IMF 수장 알렉 볼드윈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된 점, 내가 좋아한 미셸 모나한의 얼굴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주름살이 많다는 점은 옥의 티이다.

‘좀도둑 가족’이라는 원제가 아닌 그냥 <어느 가족(2018)>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이전 영화에서 천착했던 아버지와 아들이란 주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족의 의미를 묻고 있다. 일반적인 사회적 잣대로는 말도 되지 않을 만큼 비정상적인 외형을 가진 ‘만비키 가족’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어느 누구보다 끈끈한 가족애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제도와 법률은 사회구성원을 양지로 몰아세우는 일종의 공권력이다. 마치 맥락처럼. 밤새 녹아버린 눈사람처럼 어느 날 갑자기 해체되는 ‘좀도둑 가족’의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맺지 않는다. 가족은 낭만적이지 않을뿐더러 가장 잔인할 수도 있다. 어느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한다는 착각 속에서 뻐꾸기 둥지 안의 다른 새처럼 진실 밑에서 침묵하는 무서운 구성원이 될 수도 있다. 이상은 폭염에 살짝 맛이 가서 영혼을 잠식당한 누군가의 넋두리이다.

Daum 영화 소개

공작(2018) | 허스토리(2018) | 어느 가족(2018) | 미션 임파서블:폴 아웃(2018) | 인랑(2018)아이 캔 스피크(2017) |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 (2016)

볼만한 Mo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