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 Too) 운동, 이제 시작일 뿐이다

가해자가 외면한 피해자의 상처가 드러나는 방식에 대하여

유권자의 신임을 적지 않게 얻었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 20년 이상 리포터로 지난한 삶을 버티면서 신뢰와 성실의 아이콘으로 우뚝 선 한 방송인의 공통점에 대해선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교적 잘 알려진 남성들(여자도 포함)에 의해 자행된 이성(동성도 적지 않다)에 대한 폭력적인 과거사가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씩 드러나는 것이 이 정도이니 말이다.

그동안 직장, 사회에서 행해졌던 성추행, 성폭력 행태는 대한민국 범죄백서를 다시 쓰게 만들 정도다. 이러한 무분별한 행동은 여성혐오, 여성증오(Misogyny)의 시각에서 출발한다. 가부장적인 시선에서 남성은 사회, 여성은 가정에 매몰되어 생활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었지만, 이는 교육과 사회생활 참여부터 남녀의 차이를 두게 되면서 기회의 불균등에서 파생된 귀납적 오류일 뿐이다.

담론의 주제를 좀 더 확장해보면 이러한 폭력적 시각은 비단 남녀 사이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증오와 불신이라는 이름의 전염병은 직장, 학교, 가족 내부의 갑을 관계에서 비롯되어 임계점에 다다랐다. 그렇기에 폭발을 우려한 상사의 “괘념치 말거라”라는 한 마디에 그저 참아야만 했던 미생들의 소리 없는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할리우드에서 촉발된 미투(Me Too) 운동은 그 면면을 살펴볼 때 여러모로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건강하고 올곧은 사회를 만들려면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운동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미투 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심각한 외상을 입은 채 상처를 안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또한 미투 운동에 참여했으나 2차 피해를 입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지게 되는 피해자들이 생기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식해야 한다.

평범한 삶 뒤편에서 하염없이 흐느꼈을 사람들을 느껴야 한다. 미투 운동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올렸던 영화는 <슬리퍼스(1996)>다. 뉴욕 뒷골목의 꼬마 악동 4명은 어느 날 장난으로 시작한 일 때문에 한 남자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게 되어 소년원에 수감된다. 그들에게 1년 반의 수형생활은 구타, 감금, 향정신성 약제 강제 투여, 거기다가 은밀히 행해지던 간수들의 성폭행으로 인해 지옥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14년이 지난 후 우연히 식당에서 마주친 간수는 폐인이 되어버린 소년원 피해자의 손에 의해 죽는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된다. <슬리퍼스(1996)>는 소년 시절 당한 성폭력으로 삶의 상당 부분을 훼손당한 채 성인이 된 친구들을 그려낸다. 복수는 신만이 할 수 있다지만 그들의 트라우마는 누가 보상해줄 것이며, 가해자를 단죄한 뒤 남는 공허함은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한 답을 고민하게 된다.

신의 대리자로서 믿음을 주는 가톨릭 사제들. 일부 보스턴 교구 신부님들에 의해 저질러진 아동 성추행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았을 수많은 방관자에 의해 함구 된다. 영화<스포트라이트(2015)>는 외압에 굴하지 않고 저널리즘의 근본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30여 년간 자행된 성추행 사건을 파헤친 보스턴글로브 신문기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의 계속된 탐사보도는 결국 교황청의 사과를 받아내며 정의를 구현한다. 보도과정 중 맞닥뜨린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그날의 악몽에 대해 괴로워하고 있고 정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신망받는 사제를 고발함으로써 받게 되는 추가적인 피해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었다. 되풀이되는 잘못은 가해자를 합리화시켜 더더욱 악랄한 범죄를 양산하게 만든다. 결국 언젠가는, 누군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가정 내 성폭행은 인륜을 저버린 인면수심의 대표적 범죄이지만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범죄이기도 하다. 아빠를 살해한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며 고향을 떠난 지 15년 만에 다시 엄마가 살인 혐의로 기소되자 섬으로 돌아온 유능한 여기자 셀레나. 아빠의 죽음과 함께 무의식중에 증발해버린 어린 시절 아빠의 성추행을 상기하게 된다.

<돌로레스 크레이븐(1994)>은 개기일식이 있던 날 밤의 살인을 달(여성성)이 태양(남성성)을 가린다는 상징과 맥락으로 표현한다. 딸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살인의 단초가 자신이었음을 감지하고 여성으로서의 동지애를 느낀다. 어릴 때 고모부에게 성폭행 당했던 작은 소녀는 유일한 바람막이였던 엄마의 죽음과 함께 세상과 단절되었다.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 형성이 불가능해지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감정표현을 하지 못한다.

<여자 정혜(2005)>는 1m 거리에서 촬영한 핸드헬드 카메라 덕분에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미세한 감정의 흐름을 마치 옆에서 보는 것처럼 따라가게 만들었다.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존재로부터 영화 시작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름이 불리자,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녀의 얼굴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이 무미건조하기만 하다.

우울해하는 동서를 위로하기 위해 마지못해 나선 밤의 유흥. 강간당 할 뻔한 위기에서 대학생의 혀를 깨문 가정주부가 있었다. 혀를 잃게 된 가해자의 고소로 법정에 서게 된 후 믿었던 남편과 동서는 불신과 위증으로 반응하고, 이혼 경력 때문에 인격모독으로 일관하는 상대 측 변호사에 말려 과잉대응으로 실형을 선고받게 된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는 30년이 가까운 지금 돌아봐도 크게 다르지 않아, 우리의 젠더(Gender) 관은 여전히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씁쓸한 소회가 깃들게 된다. 항소심에서 변호사(손숙)의 일갈은 여전히 명징하다. “판결 전에 제가 먼저 피고 임정희에게 판결을 내려보겠습니다. 그녀는 유죄입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유죄입니다. 지금 우리는 피해자인 그녀의 처참했던 과거를 즐겼고, 치욕적인 현재를 즐겼으며, 이제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세 번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여자로서 죽임을 당했고, 현장검증에서의 모욕과 수치로 인권을 죽였고, 법정에서는 그녀의 과거와 현재가 모두 까발려지면서 한 가정의 주부로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마리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이 소녀에게 돌을 던지라.” 꽃은 줄기가 달린 채 아침이슬을 머금고 벌들이 찾는 한 향기를 뿜으며 아름답다. 무단으로 꺾어 나 혼자만 보기 위해 책상 위 꽃병에 장식하는 순간, 시들게 된다. 미투 운동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의도치 않게, 무의식적으로 범했던 나의 부주의한 행동이 누구에게는 씻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참회의 마음으로 작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