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흐름을 타고, 감성으로 흥행하다

올 겨울을 강타한 세 편의 한국영화

본과 1학년의 봄과 여름은 결강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즐겁지 않았으며, 음울하고 눈물이 많이 나던 시기였다. 해부학 실습 도중 창문이 깨지면서 날아 들어온 매캐한 최루탄은 사람들을 공황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했으며, 학교 앞 보도블록은 교내 시위대의 백골단 투척용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모두가 거리로 뛰쳐 나올 때, 그래도 너희들은 사람 목숨을 다뤄야 할 의대생이니까 공부를 해야 한다며 수업을 강행하던 일부 교수님들과 나중에 역사 앞에 면목이 없으니 시위에 동참해야 한다던 일부 학우들 사이에서 나는 전형적인 의대생의 스탠스를 보였다.

1987년은 1년 전 촛불시위의 전형이자 시민의 힘을 최초로 각성시켰던 길거리 민주주의의 도래를 예고한 엄청난 의미를 가진 한 해였다. 1980년의 광주사태는 이미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통해 역사적으로 해석되었지만 1987년의 함의는 왜 이제서야 표현되는지 모를 일이다. 당시 숙대 앞 남영동을 지나면서 느꼈던 위압감의 실체는 대학가 지하철 출구마다 자리했던 사복 경찰관의 불시검문에 의한 무소불위 공권력에 대한 까닭 모를 공포에 기인할 것이다. 1987년 1월 그 사건이 터지면서 남영동에 대해 항간에 떠돌던 소문은 실체를 지니게 되었다.

영화 <1987(2017)>은 한 세대 전 역사에 대한 기억을 짜맞춘 모호하지만 현실과 이야기 그 중간 어디쯤 있을 법한 역사에 대한 최초의 문화적 담론이다. 영화는 박한철 열사에서 시작하여 이한열 열사로 끝맺게 되며, 강동원이 분하는 이한열 열사가 등장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1부의 누아르에서 2부의 로맨스로 장르가 변화한다. 영화가 역사를 객관적으로, 그러면서도 개연성 있게 목도해내기 위해서는 시작과 끝은 물론 누가 서사를 이끌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골수 반공주의자 대공처장에 대한 묘사는 제5공화국의 짧은 뉴스 스케치를 뒤로하고 임진각 망배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이후 공포의 남영동 분실에서 의사에 의한 심폐소생술, 그 유명한 기자회견 장면, 망자를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모습은 사람을 죽인 후 아무렇지도 않게 테니스를 치는 장면과 오버랩 되며 정권이 잉태한 거대 악으로서 저항과 척결의 대상이 되어 줄거리를 이끌어 나간다. 결국 그때그때 박처장과 대척점에 서게 되는 사람들이 역사를 바꾸는 선한 역할을 맡게 된다는 의미이다.

현실에 무관심하던, 알지 못하는 자 혹은 알고 싶지 않았던 자, 대학생 연희를 바꾸게 된 계기는 시위를 주도하던 꽃미남 대학생 강동원과의 만남이었고 그녀의 평탄치 않던 가정사 역시 박처장의 그것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영화는 박처장 이외에는 인물의 캐릭터 설명에 할애하지 않으나 이후 개개인이 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중첩되면서 어느덧 나비효과처럼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부르짖게 만든다. 박종철 열사의 유골은 얼어붙은 강 위에 ‘잘 가 그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는 절규와 함께 뿌려지는데 클로즈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서럽게 느껴졌다. 역사를 바꾸고 이끄는 현장에 일조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굵은 사실과 골목길처럼 꼬불꼬불한 노변정담 같은 이야기가 뒤섞여 30년 후 똑같은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무지몽매한 인간은 결국 바보짓을 되풀이한다. 북한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북한 1호가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다면, 핵전쟁 발발이 지척에 놓이게 된다면, 그리고 우리의 우방이라 믿었던 나라들이 결국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자기 잇속만 챙기게 된다면. <강철비(2017)>는 이러한 있을 법한 가상을 영화로 담아냈다. 핵무장을 주장하는 장면을 볼 때, 이 영화가 <변호인(2013)>의 감독과 동일인이란 점을 생각하면 그의 엄청난 이념적 스펙트럼에 실로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은 우리나라는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당연한 이데올로기이다.

영화에서 미국은 대통령도 아닌 것이 대한민국 대통령과 엄청난 크기의 스크린을 통한 화상통화에서 할말을 다하는데, 그 이면에는 최대 우방 일본의 손익을 고려한 정치적 계산이 뒤섞여 한국을 압박하는 표면상 우방국으로 등장한다. 그러면서도 국정원 직원 곽철우와 CIA를 통해 막후교섭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중국은 한 번도 제대로 된 공식채널을 이용하지 않으며 중화요릿집, 길에 대놓은 자동차(밴)에서 모의를 작당한다. 일본은 공항에서 작별을 고하는 중국대사와의 자리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하는 것이 전부다. 어찌 보면 감독의 정치적 변절(진보에서 보수로)처럼 보이던 요소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자생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매력적이다.

북한의 엄철우가 말한 ‘그런 이분법적인 논리로 우리를 파악할 수 없다’는 대사는 결국 감독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내용으로 파악된다. 두 명의 아재 배우들은 기묘한 케미를 보여주는데 임진각 근처에서 국수를 먹으면서 수갑을 풀어주는 장면에서 순식간에 비워지는 북한 철우의 그릇과 이를 보는 남한 철우의 눈빛, 북한에 두고 온 딸이 좋아한다는 GD의 노래 ‘삐딱하게’를 차에서 틀어주면서 헤드뱅잉을 하며 광분(?)하던 남한 아재 곽철우의 귀여운 몸짓을 거부하지 못하던 북한 아재 엄철우의 갈 길 잃은 눈빛이다. 그러나 여배우가 클리셰에 국한된 서곡의 역할만 담당하게 되는 남성 주도의 한국영화란 점은 옥에 티로 지적된다.

또 다른 흥행작인 <신과 함께(2017)>는 판타지의 외피를 두른 ‘귀인’ 소방관 영웅 이야기에 군 의문사를 추가한 후, 익숙한 한국적 신파를 덧붙였다. 한국인이라면 느낄 수 있는, 아니 느껴야만 하는 보편적 모성애, 가족애, 형제애란 것이 실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강요된 집단 감성 내지 최면에 대한 약간의 불편함도 존재한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와 완성도가 높은 영화에는 다소의 간극이 있을 수 있다. 2시간 20분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웹툰의 설정, 등장인물을 그대로 차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지옥을 CG로 구현함에 있어 서양의 연옥을 참조하여 복제한 듯한 인상과 판관, 차사들의 정제되지 못한 언어들, 설득력이 떨어지는 귀인의 과거사들은 몰입에 방해가 되는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줄지었다는 것은 신파의 막강한 힘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이리라. 2탄에 등장할 그 분이 못내 기대되는 것은 하정우의 힘만으로 극을 이끌어 가기에는 다소 힘이 부쳐 보이는 탓도 있을 것이다.

천만 관객의 재림은 기분 좋은 일이다. 다만 우리 자본, 우리 기술, 우리 제작진과 배우들로 할리우드를 넘어서는 성과를 보이는 현상이 국수주의적으로 읽히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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