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성을 탈피하라, 영화 속 여성 캐릭터

에스피오나지(espionage), 그리고 영화 속 여성혐오(misogyny)에 대하여

“이게 뭐지?” “너무 잔인해.” 2시간 남짓 영화가 끝나고 앞에 앉은 젊은 커플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뱉은 넋두리다. 제목과 출연배우만 보면 만화적 상상력을 발휘한 스파이 영화일 것으로 생각했던 <아토믹 블론드(2017)>의 일반적이고 즉각적인 감상평이다. 5년 전 영화 감상 후에 뒷좌석 관객들로부터 들었던 비슷한 느낌의 불평이 겹쳐진다. “이게 뭐야, 속았다.” 이전 영화와 금번 영화의 차이는 배경이 되는 시대, 주연배우의 성별 정도이다. 5년 전 보았던 영화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라는 제목의 냉전시대 영국정보부에 침투한 러시아 간첩을 색출하기 위해 속고 속이는 심리전을 다룬 리얼 첩보영화로서 실제로 정보원 출신이었던 존 르카레의 소설을 기반으로 하였다.

1962년 <007 살인번호 닥터 노(1962)>는 남자들의 환상과 넘치는 액션, 첨단 무기를 잘 버무려 스파이 영화의 본격적인 효시가 되었다. 제임스 본드라는 아이콘의 등장은 비정한 스파이의 실상을 잊게 할 정도의 영웅주의와 낭만주의로 점철된 허구의 세계를 선보이며 향후 새로운 장르를 이끌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제임스 본드는 잊어라’는 광고문구를 내세운 진짜 간첩 영화인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1965)>가 발표되었다. 영국의 이중첩자인 리처드 버튼은 동독에 잠입하여 적국의 거물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살아남아야 하기에 피도 눈물도 없는 공작과 술수만이 펼쳐지는데, 로맨스나 현란한 액션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러한 첩자의 인간적이고도 실존적인 삶을 다룬 영화를 에스피오나지(espionage) 영화라 부르기 시작했고 이는 판타지 성격이 깃든 007 영화와는 궤를 달리한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냉전시대의 종말이 도래함에 따라 처단해야 할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존재했다. 에스피오나지 영화의 주제는 더욱더 개인주의로 침잠하여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게 되었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부활시켜 톰 크루즈를 새로운 007 이단 헌트로 만든 냉전시대의 TV 시리즈 <미션 임파서블(1988)>이나 영화 <본 아이덴티티(2002)>를 시작으로 한 일련의 제이슨 본 시리즈는 블록버스터 혹은 그 급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전 에스피오나지의 정신을 묵묵히 계승하고 있다.

<아토믹 블론드>는 『콜디스트 시티』라는 그래픽 노블을 각색하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시점의 급박한 상황을 주제로 한 첩보영화이다. 전세계의 스파이 명단이 모두 기재된 파일이 사라지자 각국에서 스파이를 보내어 먼저 차지하려 하는 중에 영국은 최고의 요원 로레인을 베를린으로 급파한다. 그녀는 이미 그곳에 오래전 파견된 영국 첩보원 퍼시벌과 접선을 해야 하지만 첩보부 수장 C는 그를 포함해 누구도 믿지 말라고 한다.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관객을 헷갈리게 만든다. ‘아토믹’과 ‘블론드’의 결합은 육체파 금발 여자의 이미지(bombshell)를 떠오르게 하지만 영화는 대신에 엄청난 지략과 신체 능력을 기반으로 생존을 꾀하는 여전사를 등장시키는 반어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그 흔한 남녀 간의 로맨스 하나 없이 오로지 임무에만 몰두하는 첩보원의 모습이 그려진다. 로레인의 액션은 지금껏 보아온 배우 샤를리즈 테론의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피 튀기는 격투기이며 매우 실감나고 과격하게, 잔인하게 묘사된다.

결국 액션 연기도 주인공의 생존에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하드코어적인 하부장치(subtext)였음을 알게 된다.

데이비드 보위와 조르조 모로더가 작사, 작곡한 ‘Putting out fire’는 영화 <캣 피플(1982)>의 엔딩 부분에 흘렀지만 이 영화에서는 로레인의 욕조 장면에서 나온다. 표범으로 변신하는 주인공 나스타샤 킨스키는 사람과 표범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던 중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동물원에 갇히게 된다. 베를린에서의 행적을 추궁 당하기 위해 정보국으로 소환되는 로레인의 상처 난 맨몸은 마치 캣 피플의 이미지와 중첩되어 이후 벌어질 그녀의 정체성, 피아의 구분에 대한 혼란을 상기 시킨다.

80년대 팝송을 최대음량으로 틀어내던 영화가 선택한 마지막 곡은 데이비드 보위와 퀸의 컬레버레이션, ‘Under pressure’이다. 주인공의 실체, 끝까지 살아남았던 이유 등을 영원한 아나키스트인 데이비드 보위란 인물을 통해 대신 대답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에서 외팔이 여전사 퓨리오사 역, <헌츠맨: 윈터스 워(2016)>에서 절대악 이블 퀸 역, <프로메테우스(2012)>에서 비정한 메레디스 비커스 역을 맡았던 샤를리즈 테론은 그녀의 인생작 <몬스터(2003)>를 만나기 전까지는 슈퍼모델 스타일의 금발미녀의 이미지만을 소모하는 평범한 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 에일린으로 완벽하게 빙의하여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비로소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게 된다.

이야기를 담고 있을 법한 깊은 눈망울은 발레를 통해 체득한 우아한 신체적 카리스마와 고유의 발성과 합쳐져 독특한 아우라를 풍긴다. 최근 제작자와 유엔 홍보대사, 페미니스트의 길을 걷고 있는 그녀의 향후 행보는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

최근 <청년경찰(2017)><VIP(2017)>에서 보였던 여성혐오(misogyny) 라는 컨텍스트는 페미니즘에 대해 대중의 무의식에서 작동되고 있는 전방위적 반감을 부주의하게 드러낸 사회적 현상의 한 단면이다. 여자를 헌팅의 대상으로 규정짓거나,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납치, 강간, 살인하는 젊은 고위층이 등장하는 영화는 그릇된 사회적 용인의 수준을 드러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영화(우리나라 영화)는 남자배우가 주도해야 하며 조연으로 등장하는 여자배우는 마치 MSG처럼 용인된 한도 내에서 조리되어야 하며, 성역할에 따라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강제되는 한, 한국에서 샤를리즈 테론 같은 배우는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살인자로 분한 <악녀(2017)>에서의 김옥빈은 존재 자체로 반갑지만 그녀는 천정과 바닥으로 튀는 헤모글로빈과 중저음의 남성 목소리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는다. 남성 위주의 영화 제작 환경이 빚어낸 소꿉장난에서의 엄마 아빠 바꾸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씁쓸한 생각은 나만 드는 것일까?

칸 영화제에서 <매드맥스>가 페미니스트 영화인지 질문 받은 샤를리즈 테론의 답변은 그래서 직설적이고 속시원하다.

“사람들은 페미니즘이란 말만 들어도 갑자기 경직되는 면이 있어요. 무슨 우리가 무대 위에라도 올라선 것처럼 말이죠. 조지 밀러 감독은 여성도 남성만큼이나 복잡하고 흥미로운 존재라는 걸 이해하고 보여주었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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