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리언 : 커버넌트>가 던진 경고에 대하여

견고히 쌓은 <에이리언> 시리즈의 기원

이제 팔십 줄에 접어든 노감독 리들리 스콧의 직전 작품<프로메테우스(2012)>의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시퀄(Sequel, 속편)이자, 수많은 아류영화를 탄생시켰던 우주괴물 시리즈 <에이리언(1979)>의 프리퀄(Prequel, 전편)이기도 한 <에이리언 : 커버넌트>가 몹시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본격적으로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 <블레이드 러너(1982)>를 다양한 버전으로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그의 필모그래피는 여전히 에픽과 SF 사이를 노닐지만 이번 영화는 관객들의 호기심을 완전히 해소시키지 못했다. 거장의 수십 년 염원이 농축된 작품은 요즘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지 못한 것이다. 직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한 번의 관람으로는 줄거리를 따라가기 어렵지만 영화 곳곳에 깔아놓은 장치들은 스스로 생각하여 터득하라는 도발적인 동기부여로 읽힐 만하다. 그래서 내 나름의 방식으로 그가 말하려는 바를 풀어보려고 한다.

근 40년간 감독이 천착했던 주제는 외계생명체(에이리언)의 근원이었다. 영화사 20세기폭스는 1977년 <스타워즈>의 엄청난 성공을 이어갈 또 하나의 SF영화를 찾고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 댄 오배넌과 로널드 슈셋의 참신한 아이디어는 영국에서 건너온 젊은 연출가 리들리 스콧의 패기와 만나 전위적 예술가 H.R. 기거의 화보 속 제노모프(Xenomorph)라는 전대미문의 우주괴물을 화면 속에 그대로 재현하였다. 직립보행을 하고 연질의 보호막이 머리 부분을 감싸고 있으며 두 개씩 붙어있는 총 5개의 손가락을 가진, 산성 침을 흘리는 괴물 말이다. 안드로이드의 가슴을 뚫고 나온 괴물(체스트 버스터)은 이후 제임스 카메론, 데이빗 핀처, 장 피에르 쥬네 감독의 <에이리언> 시리즈를 거치면서 조금씩 변형되어간다.

<에이리언 : 커버넌트>에서는 감독이 의도했던 대로 제노모프의 탄생 비화가 드러난다. 전편 프로메테우스에서 목만 살아남은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홀로 살아남은 엘리자베스 박사의 몸을 이용하여 괴물을 창조해낸다. 영화가 시작될 무렵 데이빗을 만든 웨일랜드 박사에게 “나를 만든 사람이 아버지(웨일랜드)라면 당신은 누가 창조하였나요?”라고 묻고, 피아노 연주를 청하는 아버지에게 들려준 음악은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 중에서 ‘신들의 발할라 입성’이었다.

이 곡이 수록된 ‘라인의 황금’ 마지막 부분에서 죽은 영웅들이 들어가는 곳은 스칸디나비아 신화 속의 발할라 궁전이며, 여기서 입궁이란 기존의 창조주인 신들의 종말을 의미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아의 방주처럼 새로운 우주 서식지로 향하는 수면 캡슐 속 인간들과 인간 배아를 지니고 유영하는 커버넌트 우주선에서 홀로 깨어있는 데이빗이 냉동 배아 보관소에 제노모프 배아 2개를 넣으면서 중앙컴퓨터의 선곡 요청에 화답하는 음악 역시 바그너의 그것이었다.

전편인 프로메테우스가 엔지니어라고 불리는 우주인들의 숨결에 의해 우연히 창조된 인류의 기원에 대한 암시였다면, 이번 영화는 피조물인 안드로이드(A.I)가 인간을 초월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능동적으로 이종 교배, 진화시켜 궁극의 괴물을 창조한다는 새로운 형태의 종의 기원이다. 영화 중반 데이빗은 불의의 사고로 최초 목적지가 아닌 중간 기착지에 도착한 인간 승무원들이 기체 형태로 체내에 침투한 괴생명체에 의해 죽어나갈 즈음 두건(대개 구세주를 의미)을 쓰고 등장하여 남은 인간을 구원한 후 자신의 아지트로 인도한다.

외형이 똑 같은 두 명의 안드로이드는 비로소 이렇게 대면하게 된다. 창의적이지는 않으나 논리적으로는 빈틈없는 2세대 월터와 마주친 1세대 구형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창조에 대해 언급한다. 스스로 작곡한 곡을 피리로 연주하면서 따라할 수 있는지 묻고, 키스하면서 느낀 감정에 대해 묻고, 사고로 남편이자 우주선 함장을 잃은 대니얼스를 보호하려는 월터에게 실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결국 안드로이드인 데이빗은 그의 창조주였지만 실망스러웠던 존재인 인간을 파괴시키고 괴물을 인간의 목숨과 바꾸면서 새롭게 창조해낸다. 그가 창조한 제노모프는 난자와 정자를 가지고 생식력이 있는 인간에게는 기생하여 생명을 앗아가지만 불임의 존재인 창조주 데이빗에게는 절대 순종한다. 또 하나의 절대권력이 강림하는 순간이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감독이 영화 내내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은 인간과 복제인간 중에서 누가 더 인간다운 존재인가였다. 리플리컨트는 4년의 연한이 되면 기능이 멈춰지는 시한부 생명을 가졌지만 어느 누군가의 감정과 기억을 가진 채로 최후를 맞이한다. 이 때문에 항상 종말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피조물이다. 수명 연장을 위해 사람을 죽였던 복제인간 로이 베티는 마지막까지 그를 추적하는 릭 데커드를 죽일 수 있었지만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산성비를 맞으며 스스로 죽어가고, 데커드는 그를 사랑하는 복제인간 레이첼의 마지막 시간이 가까웠음을 알고는 그녀와 함께 도망가는 것을 선택한다.

영화에서 인간과 복제인간을 구분하는 방법은 눈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결국 보는 행위란 지각적으로 형성되는 뇌의 착각일 뿐이며 보이는 모든 것이 전부 다 진실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에 닿게 된다. 높은 망루의 감시탑을 통해 자신은 노출시키지 않은 채 모두를 감시할 수 있다는 판옵티콘(Panopticon)이란 개념은 시각이란 행위가 얼마나 교조적이고 전체주의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미셸 푸코는 그의 책 <감시와 처벌>에서 “판옵티콘을 통해 권력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하는 것이며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근대 이후는 새로운 방식으로 권력이 행사되고 있음을 경고했다.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답답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바로 권력이란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나라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지도자는 모두 혐오발언을 일삼으며 ‘Me First’ 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이들이 바로 우경화에 불을 붙이는 ‘제2의 창조주’를 표방하는 인물들이다.

이 와중에도 한국사회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힘으로 법 위에 군림하려 했던 권력자를 몰아내고 민주적이라고 평가받는 인물을 앉혔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면 위의 사람만 바뀌었을 뿐 한국사회를 아프게 하는 온갖 병리요소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파시즘이 우리를 좀먹지 않도록 사실을 직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올라가게 되면 이후에 무엇이 있을지 걱정해야 하고 과거를 부정하면서 괴물을 창조하여 모두가 나락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잠식당해 메타 권력에 물들지 않도록. 감독은 이를 경고하기 위해 바그너의 음악과 셸리의 시를 차용한 듯하다.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중의 왕. 강대한 자들아, 나의 업적을 보아라. 그리고 절망하라!”